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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별의 연대기』 운명을 거스른 자의 이야기

검은 별의 연대기, 운명을 거스른 자의 이야기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한동안 멍한 기분이었다. 『검은 별의 연대기』는 단순히 판타지 소설이라는 틀을 넘어선 작품이다. 이 소설은 신화의 운명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충돌하는 차가운 전장에서, 한 전사가 피와 고통으로 써 내려간 일대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카일 모르드렌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별 아래에 찍힌 저주받은 존재다. 그는 세상의 균형을 지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길러지지만, 이 책의 진짜 전율은 그가 운명에 복종하지 않고 이를 뒤엎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칼을 들고 신들마저 찢어버리는 그의 모습은 영웅담이라기보다는 저항의 상징에 가깝다. "나는 태어났고, 나는 쓰였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내 이름으로 살 것이다." 작가는 놀라운 세계관 구성 능력을 보여..

카테고리 없음 2025.07.21

나는 외계인이 분명하다

나는 외계인이 분명하다이상하게도 사람들과 섞여 있을 때면, 나는 늘 약간의 소외감을 느낀다. 무리에 어울리고, 웃고,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마치 투명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세상을 구경하는 기분이 든다. 오늘도 그랬다. 회사 회의실 한쪽 구석에 앉아 누군가의 열정적인 프레젠테이션을 바라보며, 나는 슬며시 시계를 바라봤다. 숫자들이 점점 분해되어 기하학적 문양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는 그 순간 스스로를 다시금 확인했다. ‘그래, 나는 외계인이 분명해.’ 퇴근길, 을지로 골목 어귀의 오래된 붕어빵 노점 앞에 잠시 멈췄다. 젊은 사내가 손난로처럼 붕어빵 봉지를 꼭 쥐고 연신 입김을 불어댔다. 주인 할머니가 나를 향해 “세 개 천 원이에요.” 하고 말했지만, 나는 대답..

카테고리 없음 2025.07.18

『달의 뒷면에는 꽃이 핀다』를 읽고

꿈과 기억 사이를 떠도는 여정책장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달의 뒷면에는 꽃이 핀다』는 그런 책이다. 처음엔 제목이 주는 몽환적인 느낌에 이끌렸고, 한두 페이지 넘기다 보니 어느새 나는 이 세계 안에 조용히 침잠하고 있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현실과 꿈, 과거와 현재가 미묘하게 겹쳐진 듯한 세계다. 주인공 ‘루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억 상실을 겪으며, 매일 밤 기이한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녀는 달의 뒷면이라는 공간에 발을 들이고, 그곳에는 사람의 기억에서 잊힌 것들이 꽃의 형태로 피어나 있다. 이 설정은 너무도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슬프다. 특히 '시간이 흘러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순간들은 꽃으로 피어난다'는 구절은 한참 동안 마음을 붙잡았다. 책은 단순한 판타지 드..

카테고리 없음 2025.07.16

어떤 기억은 향기로 남는다

어떤 기억은 향기로 남는다늦가을이었다.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붉은 단풍이 바닥에 융단처럼 깔리던 시기. 출근길 골목 어귀에 자리한 오래된 빵집 앞에서 나는 그 냄새를 처음 맡았다. 따뜻한 버터 냄새에 약간의 계피,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달콤한 향. 마치 누군가의 기억이 피어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매일 아침 그 골목을 지나가면서도, 이전까지는 그냥 지나치던 곳이었다. 문득 어느 날, 냄새에 이끌리듯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문을 열었다. 안은 소박했다. 오래된 나무 진열장, 거칠게 벽을 따라 놓인 테이블 몇 개, 그리고 머리를 질끈 묶은 주인 아주머니가 “따끈한 크루아상 나왔어요.”라며 웃고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커피를 주문하고, 따끈한 크루아상을 하나 골랐다. 자리에 앉아 ..

카테고리 없음 2025.07.15

그때 그 사람이 건넨 한마디

그때 그 사람이 건넨 한마디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왔다. 서울의 가을은 늘 예고 없이 다가온다. 아침 출근길, 서늘한 바람이 셔츠 틈 사이로 스며드는 걸 느끼고서야 ‘아, 가을이구나’ 하고 깨닫는다. 바람도 사람처럼, 말은 안 해도 존재감을 남긴다. 나는 서울 북쪽 성신여대 근처의 작은 원룸에서 살고 있다. 회사는 강남. 하루 왕복 두 시간의 출퇴근이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됐다는 뜻일까. 한 달 쯤 전인가, 나는 퇴근길에 혼자 술을 마셨다. 딱히 우울한 일은 없었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텅 빈 저녁시간에 밀려오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어두운 골목 안, 자주 가던 작은 선술집 문을 밀었다. 그곳은 주방이 홀에서 훤히 보이는 구조였다. 사장님은 5..

카테고리 없음 2025.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