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별의 연대기, 운명을 거스른 자의 이야기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한동안 멍한 기분이었다. 『검은 별의 연대기』는 단순히 판타지 소설이라는 틀을 넘어선 작품이다. 이 소설은 신화의 운명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충돌하는 차가운 전장에서, 한 전사가 피와 고통으로 써 내려간 일대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 카일 모르드렌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별 아래에 찍힌 저주받은 존재다. 그는 세상의 균형을 지키기 위한 ‘희생양’으로 길러지지만, 이 책의 진짜 전율은 그가 운명에 복종하지 않고 이를 뒤엎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칼을 들고 신들마저 찢어버리는 그의 모습은 영웅담이라기보다는 저항의 상징에 가깝다.
"나는 태어났고, 나는 쓰였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내 이름으로 살 것이다."
작가는 놀라운 세계관 구성 능력을 보여준다. 검은 별이 하늘에 떠오를 때마다 발발하는 대륙의 전쟁, 피를 흡수하는 생명 나무, 기억을 저장하는 바위산과 죽음의 사서들이 거닐던 하얀 도서관까지. 세계는 어둡고 처절하지만, 그 안에 숨은 고요한 시적 정서는 ‘다크 판타지’의 진수를 보여준다.
전쟁과 저주, 복수로 뒤덮인 세계에서 인간 관계를 다루는 방식 또한 놀랍다. 카일과 그의 유일한 동료였던 이샤 벨렌의 대화는 서사 전체에 유일한 빛처럼 다가왔다. 끝없이 피를 흘리는 이야기 속에서도, 독자는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의 무게를 느끼게 된다.
"신은 네 운명을 예언했지만, 나는 너의 여정을 함께했다."
특히 마지막 장에서 이샤가 남긴 편지는 가히 이 작품의 정수다. 전장은 멈췄고, 신들은 쓰러졌으며, 카일은 운명을 재정의했다. 하지만 그 끝에서 남는 것은 피가 아니라 기억, 이름, 그리고 함께 걷고자 했던 이들의 발자국이다.
쉽지 않은 독서였다. 무수한 피와 희생, 칠흑 같은 묘사들이 끊임없이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은 내 안의 저항하는 인간성을 일깨웠다. 운명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부수고 새로 쓰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이 연대기가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다 읽고 나면 왠지 모르게 밤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검은 별이 진짜 있는지도 모를 하늘을. 그리고 그 아래에서 우리 역시 각자의 피와 기억으로 연대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 말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