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은 향기로 남는다
어떤 기억은 향기로 남는다
늦가을이었다.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붉은 단풍이 바닥에 융단처럼 깔리던 시기. 출근길 골목 어귀에 자리한 오래된 빵집 앞에서 나는 그 냄새를 처음 맡았다. 따뜻한 버터 냄새에 약간의 계피,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달콤한 향. 마치 누군가의 기억이 피어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매일 아침 그 골목을 지나가면서도, 이전까지는 그냥 지나치던 곳이었다. 문득 어느 날, 냄새에 이끌리듯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문을 열었다. 안은 소박했다. 오래된 나무 진열장, 거칠게 벽을 따라 놓인 테이블 몇 개, 그리고 머리를 질끈 묶은 주인 아주머니가 “따끈한 크루아상 나왔어요.”라며 웃고 있었다.
나는 평소처럼 커피를 주문하고, 따끈한 크루아상을 하나 골랐다.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낯익음이 스며들었다. 어릴 적, 외할머니 댁에서 들었던 향과 아주 비슷했다. 외할머니가 명절 준비하며 군고구마 굽던 겨울, 군불 피우던 연탄방, 그 따뜻하고 투박했던 시간의 공기. 그 기억이 갑자기 향기로 되살아난 것이었다.
나는 크루아상을 베어물며 조용히 웃었다. 잊고 살았던 기억은 어느 날 이렇게 불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사진 한 장, 때로는 오래된 노래 한 구절, 그리고 어떤 날은 바로 이런 ‘향기’로.
그 후로 나는 일주일에 한 두번 그 빵집에 들렀다. 단골이 되었다기보다, 나만의 작은 안식처를 갖게 된 기분이었다. 아주머니는 내 얼굴을 기억했고, “출근 전엔 단팥빵이 좋죠.”라며 알아서 챙겨주셨다. 우리는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그 안에 서로를 향한 응원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 빵집은 몇 달 전 문을 닫았다. 재개발 때문이었다. 건물 전체가 철거될 예정이라 했다. 마지막 날, 나는 일부러 퇴근길에 들러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아주머니는 내 손에 작은 봉지를 건네며 말했다.
“크루아상 하나, 단팥빵 하나예요. 향기까지 포장해뒀으니 조심히 들고 가세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따뜻하게 데운 빵을 한입 베어물었을 때 아주머니의 말처럼 그 향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우리는 종종 삶을 향기 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어떤 순간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에 스며들고,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도 가끔 출근길에, 같은 골목을 지날 때면 코끝을 스치는 바람 속에서 그날의 냄새가 다시 피어난다. 그리고 나는 문득 생각한다. 어떤 기억은, 정말 향기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