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이 건넨 한마디
그때 그 사람이 건넨 한마디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왔다. 서울의 가을은 늘 예고 없이 다가온다. 아침 출근길, 서늘한 바람이 셔츠 틈 사이로 스며드는 걸 느끼고서야 ‘아, 가을이구나’ 하고 깨닫는다. 바람도 사람처럼, 말은 안 해도 존재감을 남긴다.
나는 서울 북쪽 성신여대 근처의 작은 원룸에서 살고 있다. 회사는 강남. 하루 왕복 두 시간의 출퇴근이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됐다는 뜻일까.
한 달 쯤 전인가, 나는 퇴근길에 혼자 술을 마셨다. 딱히 우울한 일은 없었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텅 빈 저녁시간에 밀려오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어두운 골목 안, 자주 가던 작은 선술집 문을 밀었다. 그곳은 주방이 홀에서 훤히 보이는 구조였다. 사장님은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고, 말수가 적었다. 나는 평소 그와 말을 많이 나누진 않았지만, 뭔가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듯한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날 나는 조용히 안주와 술을 시켰다. 텔레비전에선 야구 중계가 흘러나왔고, 몇 테이블 옆에선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이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멈추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바람이 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제는 어느정도 익숙해 진 외로움이 다시 밀려오는 것 처럼.
그때였다. 사장님이 내 테이블 앞에 조용히 물수건을 하나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즘 많이 힘들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질문만으로 뭔가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사장님의 눈빛은 묻지 않았다. 그냥, 건넸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이.
그는 내 술잔에 조용히 소주를 따라줬다. 그때 건넨 그 한마디는 위로라기보다는, ‘보였어요’라는 작은 시인 같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누군가의 감정이 ‘보인다’고 느끼는 순간은 얼마나 드물고 낯선가.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나아졌다. 누군가의 시선에 담긴 온기 하나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은 대체로 외로운 일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이웃과 인사를 나누지 않고, 같은 회사 동료는 업무적인 관계일 뿐이며, 지하철에선 이어폰을 꽂고 고개를 숙인다. 연결되지 않는 것들이 우리를 편하게 만들지만, 그 편안함은 종종 공허로 바뀐다.
지금도 문득문득 그날이 떠오른다. 가을밤, 반쯤 비어 있던 선술집, 사장님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내 대답 없는 고개 끄덕임. 삶은 어쩌면 그렇게, 말보다 말 아닌 것들로 채워지는 것 같다.
요즘도 나는 가끔 그 가게에 간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누군가가 내 안을 바라봐줬던 그 공간이 아직 거기에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그날처럼 사장님은 말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를 알아주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가을 바람은 다시 불어오고, 나는 또다시 그 거리를 걷는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스쳐 가고, 불빛이 바닥에 그림자를 그린다. 아주 가끔, 그 그림자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생긴다면, 나도 그날의 그 사람처럼 건네고 싶다.
“요즘 많이 힘들어요?”
말보다 마음이 먼저 닿는 그 한마디를.